맨위로가기

조우 (조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우는 조조의 아들이자 조비의 이복 동생으로, 위나라의 제후왕이었다. 211년 도향후에 봉해진 후 작위를 거쳐 연왕에 이르렀으며, 조카인 위 명제의 총애를 받았다. 명제가 죽기 전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아들 조환이 위나라 황제가 되었지만 진나라 건국으로 연공으로 강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78년 사망 - 극정
    극정은 촉한의 관료이자 문장가로, 유선의 항복 문서를 작성했으며 위나라에 항복 후 관내후에 봉해졌고, 유선은 그의 학식에 감탄하며 후회했으며, 시, 논, 부 100여 편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78년 사망 - 양휘유
    양휘유는 서진의 황족이자 사마사의 세 번째 부인으로, 덕망이 높아 사마사의 사후 조카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하자 황태후로 존경받았으며 경헌황후로 추존되었다.
  • 조위의 대장군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조위의 대장군 - 조인
    조인은 조조의 사촌 동생으로, 궁술과 마술에 능했으며 조조를 도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위나라 건국과 안정에 기여한 위나라의 장군이다.
  • 조조의 아들 - 조곤
    조곤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으로 조조의 아들이며, 문장력이 뛰어나 조비와 조예 시대에 여러 왕에 봉해졌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조예의 칭송을 받아 사후 공왕으로 추증되었다.
  • 조조의 아들 - 조비
    조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조조 사후 위왕과 승상 자리를 이어받아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는 등 내정을 정비했으나 오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요절했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장경국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조우 (조위)
기본 정보
이름조우 (曹宇)
펑쭈 (彭祖; Pengzu)
생애
출생196년 ~ 211년 사이 (추정)
사망278년
가문
성씨조 (曹)
가문조씨 (曹氏)
아버지조조
어머니환 부인 (Consort Huan)
배우자장 부인 (Lady Zhang)
자녀조환
관직 및 작위
작위연왕 (燕王)
임기 시작232년
작위 변경연공 (燕公)
임기 종료265년
봉지연 (燕)

2. 생애

조우는 조조의 아들이자 후궁 환부인(環夫人)에게서 태어났다. 슬하에 조충과 조거(曹據) 두 형제가 있었다.[3] 조비의 혈통이 끊어지면서, 아들 조황고귀향공의 뒤를 이어 위나라 황제를 승계하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아들 조환이 황제가 되었을 때에도 연왕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의 공국 내 과세 가구 수는 조예, 조방, 조모, 조환의 치세 동안 증가하여 5,500호에 달했다.[7] 조환 즉위 후, 상소를 올려 동지를 축하했는데, 이때 '신'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조환은 조칙을 내려 선례를 조사한 후, 조우를 위해 특별 대우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작위 변동

211년 후한 조정으로부터 도향후에 봉해졌으며, 217년 노양후로 작위가 변경되었다.[4] 221년 이복 형 조비후한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조위를 건국하자 공작이 되었고, 이듬해 하비왕(下邳王)에 봉해졌다.[5] 224년 조비가 제후왕을 모두 현왕으로 강등하는 조칙을 발표하면서 단보현왕으로 봉해졌다.[5] 232년 조예 치세에 연왕(燕王)으로 칭호가 변경되었다.[6]

2. 2. 조예와의 관계 및 대장군 임명

조예는 어릴 적부터 조우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으며, 226년 조예가 황제에 오른 후에도 조우를 총애하여 특별히 대우하였다.[5] 235년 조우는 위나라 황실 조정에서 봉사하도록 소환되었다.[6] 237년 예 (鄴; 현재의 한단시, 허베이성)로 돌아갔지만, 238년 여름에 위나라 수도 낙양으로 다시 소환되었다.[6]

239년 조예가 병에 걸리자 조우는 문병을 위해 연일 방문했다. 조예는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아, 조조·조상·하후헌·진랑 등 위의 종실과 각료들과 함께 유자 조방을 보좌하게 하려 했다.[10] 그러나 조우는 겸손한 성격이었기에 이를 굳게 사양했다. 유방손자는 조우가 대임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조우 대신 조상·사마의를 후견으로 삼도록 권했다.[10] 조예의 의지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결국 조우 등은 면직되어 중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10] 이후 대장군직은 조진의 장남 조상에게 넘어갔다. 정치적인 권한에서는 멀어졌지만, 이후에도 몇 번인가 가증을 받았다.

2. 3. 아들 조환의 즉위와 조위 멸망

조비의 혈통이 끊어지면서, 아들 조환고귀향공의 뒤를 이어 위나라 황제를 승계했다.[7] 265년,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자 조우는 연공으로 강등되었다.[9]

사마소촉 정벌을 완수하고 진왕이 되자, 조환은 사마소를 아버지인 조우보다 윗 관위에 임명하여 우대했다고 한다. (『진서』 문제기)

265년,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하고, 서진이 성립하자 조우는 연공으로 강등되었다. 함녕 연간에 사망했다. 278년(함녕 4년), 조환은 죽은 아버지를 명제에게 합사하고 싶다고 청했으나, 관리의 진언으로 사마염은 "왕[11]은 위의 후계자이며, 그 지위는 무겁다. 개인적인(황제가 된 것은 아니다) 친족을 위해 허락할 수 없다"라고 거절했다. (『진서』 권20 예지 중)

3. 가족 관계

참조

[1] 정보
[2] 인용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인용
[7] 인용
[8] 인용
[9] 인용
[10] 인용
[11] 정보 陳留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